
부산민언련 10주년 기념 회원문집
「혼자 꾸는 꿈, 여럿이 꾸는 희망」 중
‘부산민언련 탄생의 비화’ (글: 채 백)
1992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10월 경에 부산일보 대강당에서는 월간 「말」지 부산경남지사 주최로 언론관련 초청 특강이 개최되었다. 당시 강사는 서울 민언련의 의장을 맡고 계시던 정동익 선생과 KBS 노조위원장을 역임한 김철수 씨였다. 강연이 끝나고 저녁 자리에서 정동익 선생께서 부산에서도 시민언론단체가 떠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킬 것을 제안하셨다. 정동익 선생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부산에 부임하기 전 내가 한겨레신문의 신문주평팀에 참여하고 있었던 관계로 나는 이른바 ‘민주인사’로 분류되면서 정동익 선생이 나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당시 말지 부산경남지사장이던 우리의 이진규 씨와 황미향 씨, 그리고 동아대의 김민남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준비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이 모태가 되어 그해 대선 국면에서는 언론모니터도 하였다.
1년 뒤인 1993년 11월에는 이 준비모임이 준비위원회로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이 준비위원회에서 얼떨결에 내가 당시 동아대 신문방송학과에 계시던 강상현 교수와 함께 공동준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나로서는 ‘얼떨결에’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략) 하지만 ‘준비위원회’의 대표일 뿐이라는 주위, 특히 이진규 씨의 회유와 강권에 덥석 맡게 되었다. 그 준비위원회 시절부터 언론학교도 개설, 운영하였다.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언론학교에 당시는 수강생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그런데 남은 문제는 정식 출범을 해야 하는데 그게 뜻대로 잘 안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딴 거 없었다. 단지 대표를 맡아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압력이 계속 되었다. 나는 계속 저항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4년 3월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밤 강상현 교수가 나에게 전화를 해서 바로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우리 집 근처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구서역 앞의 지금은 없어진 어느 허름한 삼겹살 집에서 마주 앉아 나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면서 ‘우리라도 맡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나도 더 이상 다리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라도 이걸 살려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강교수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공동대표를 맡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산민언련이 1994년 4월에 출범의 닻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